20 Something Century

기차는
폐허로
떠나네

그의 치열했던 20대의 생존기를 듣기 위해 영주까지 달려갔다.
그가 들려준 철로의 이야기는 이제 그의 기억 속에만 남아 있으니 언젠가 세상에서 완전히 잊힐 것이다. 그의 기억 하나 하나를 더듬어 철로를 놓고, 그가 운전하는 기관차를 탑승해 기억 속을 서행하기 시작했다. 기차는 1950년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우리는 한 20대 청년을 만날 것이다.
김노한. 나이 23세. 그는 최연소이자 국내 최초 그리고 최후의 종군(從軍)기관사다.

1950년 6월 25일 기습공격을 감행한 북한군이 서울 시내에 입성하기까지 단 3일이 걸렸다.
북한의 전력은 남한의 두 배로 전혀 상대가 되지 않았다. 북한은 각각 200여대의 전차와 전투기를 가지고 있었지만 우리에게는 거의 전무했기 때문에 함락은 빠르게 진행됐다.
당시 북한은 38도선 전역에서 일제히 공격을 개시해 한 달 만에 부산까지 진군한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살기위해 남쪽으로 머나먼 피난길에 올랐다. 비상 국무회의 결의로 철도에도 동원령을 내리게 되고 김노한 기관사(90세)는 그렇게 군사수송작전에 참가하게 됐다. 당시 그의 나이 23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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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7월 5일. 영주역에서 철도 직원들과 함께.

어떻게 종군 기관사가 되셨습니까?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는 영주에서 태백으로 가는 철길을 만들던 중이었어요. 철길 만드는 것도 중단됐죠. 1950년 7월 26일에 풍기 주재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상부에서 연락이 왔는데, 기관차 한 대를 끌고가서 20㎞ 떨어진 죽령역에 있는 고장난 군수품 차량을 끌고오라고 하더군요. 못 가면 아군들 총에 맞아죽던지 몽둥이로 맞아죽던지 우리가 죽기 아니면 살기다. 그 때 내가 스물세살이었고 열여덟, 스무살 먹은 두 기관조사를 끌어안고 ‘가야 된다’ 그랬더니 얼굴이 새파래져요. 내가 운전을 하고 기관조사 둘을 연통에 넣고 문을 닫아 걸어줬지. 출발하고 좀 지나니까. 총알이 얼마나 빗발치는지 기관차가 뒤집어지는거 같더라고요. 그래도 속도를 내서 가는데 가다가 뒤를 돌아보니 물탱크에 총알을 맞아서 구멍이 나서 물이 철철 새고 있더라고요. 물이 없으면 기관차가 못 가니까 방지하기 위해서 길이 30cm되는 나무로 막았어요. 가보니까 너무 크게 뚫려서 걸레를 말아서 철사로 조아서 망치로 두드려서 물을 새는 걸 막고 죽령을 넘어갔습니다. 터널길이가 4.5㎞입니다. 터널안에서 물탱크로 막고 죽령 내려가서 풍기까지 내려오면 물을 실을 수 있다. 이런 계산을 하고 한 1km이상 내려갔어요. 그렇게 정신을 차려서 죽든살든 우리가 목적달성 해보자. 절대로 겁내지 말아라. 죽령을 넘어가서 기관조사 한 사람을 나오라해서 거기 있는 화차를 기관차에 연결을 시키라고 했죠. 그 뒤에 화차까지 연결이 됐나 안 됐나 보고 제동 호스 연결만 확인하고는 달리기 시작했어요. 차를 끌고 내리막길을 서서히 내려가며 ‘어떤 일이 있더라도 풍기까지 운전해 갈테니까 아무리 총을 쏴도 절대 놀라거나 나오지 말라’고 했죠. 얼마나 총알이 몰아치는지 까짓것 최고속도를 내버렸죠. 내려가다 사고로 죽거나 총에 맞아 죽거나 마찬가지니까요. 풍기역에 무사히 도착했더니 역사는 텅텅 비었어요. 명령했던 사람도 역장도 수송관이고 뭐고 전부 도망가고 없어요. 허탈해서 앉아있는데 퉁수소리가 들려와요.

퉁수소리요?

우리가 잃어버린 군수품을 찾아왔는데 참 눈물겹더라고요. 밤 11시가 되니까 기분 나쁜 퉁수 소리가 들려와요. 당시 인민군들이 넘어오면서 퉁수를 불었거든. 그 소리가 서늘하고 오싹해요. 그래서 일단 떠나기로 마음먹고 영주역까지 갔더니 홈 바닥이 인산인해였어요. 피난민들이 모여가지고. 사람은 많은데 얻어먹을 것은 없고 기관조사를 보내서 먹을 걸 좀 얻어오라고 했어요. 기관조사 둘이 가더니 쌀 조금하고 된장, 고추장 단지랑 다른 반찬들을 가지고 왔어요. 그래서 탱크에 녹이 벌겋게 슨 물을 퍼가지고 와서 군용 도시락에서 쌀을 씻어서 이글거리는 화실 안에서 불을 떠내서 밥을 했어요. 그걸 먹고 나니 이젠 여한이 없겠다 싶더라고요. 그렇게 밤을 보내고 일어났는데, 피난민들이 무서우니까 다 열차 밑에 들어가서 자고 있어요. 그 사람들 태워서 오가며 군수품하고 피난민들을 문수역으로 날랐어요. 어디서 그렇게 사람들이 많이 내려오는지 끝이 없었지, 그리고 팔 떨어지고 다리 떨어진 군인들도 즐비했어. 살려달라고 역 홈에서 피를 흘리면서 아우성이에요. 군수품을 한쪽으로 치우고 부상병들을 실었어요. 저쪽에서는 인민군들이 몰려오고. 서행으로 출발하면서 피난민들 태우고, 아수라장이었지. 가다보니까 보급열차가 마주오고 있어요. 뒤에는 병원열차가 따라오고. 세대가 한 철로 위에 뒤엉킬 판이었는데 기관조사를 내려 보내서 교통정리를 시키고. 그런 위험한 상황들이 계속해서 일어났어요. 목이 타들어가니 기관차 물탱크에 녹이 벌겋게 슨 물을 그냥 마셨어요. 이래죽으나 저래죽으나 하는 마음으로 평은역까지 또 내려갔어요.

작전 수행은 얼마나 오래 하신거지요?

그날부터 정확히 615일 동안 계속됐지요. 당시 수송 기관차들이 부산에서부터 올라온 군수품을 안동에서 내려놓고는 그냥 가버려요. 너희가 가져가서 단양으로 넘기라는 거죠. 풍기역에서 죽령까지 넘어가는 데가 경사가 심해서 위험구간이에요. 단양으로 내려가자면 내리막이 되는데 이게 또 급경사죠. 그렇게 고개를 오르내리고 하다보면 짐은 많고 기관차 힘은 모자라죠. 그러다보니 기관차 한 대가 더 갖다 붙습니다. 오르막에서는 밀어줘야하고 내리막에서는 당겨줘야 하고요. 이게 하루에 한 두 번이 아니라 수십 번을 왔다 갔다 해야 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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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열차에는 어떤 것들이 실렸지요?

군수품수송 열차지만 피난민들도 많았습니다. 살겠다고 기차에 올라타는 사람들을 내칠 수는 없었지요. 경기도·강원도·충청도 사람들이 피난 가려고 철길에 즐비했어요. 그 풍경은 정말로 암담했어요. 어디를 가는지도 모르고 그냥 하염없이 걷고 있는 사람들이죠. 열차만 보이면 달려들었어요. 허기에 지쳐 길가에 쓰러져있는 이들도 많았고. 그 끝에서 삶이 있는 지 죽음이 기다리는 지 아무로 알 수 없었어요. 615일간 밤낮으로 군사수송을 했으니 우리도 쓰러지긴 마찬가지였어요. 그래서 기관조사보고 “내가 잠이 들거든 빨리 발을 땡기든지 손을 땡기든지 해서 잠을 깨워라”고 당부했어요. 그런데 기관조사도 똑같이 힘들어요. 한 기관차에서 기관조사 둘을 데리고 다니거든요. 수십톤의 석탄도 물도 실어 날라야 하죠. 연료를 싣다보면 물을 못 실을 때가 있어요. 개울가가 있으면 그 물을 기관차에 실어야 합니다. 또 화력을 유지해야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작업을 해야 해요. 24시간을 하고선 교대를 해야 하는데 교대하면서 땀이 식으면 작업복에서는 소금이 맺혀서 바스락바스락 소리가 났어요. 그 옷을 세탁할 틈도 없이 몇 달간 입고 달렸어요. 하지만 그것보다 괴로운 것은 먹을 것이 없었다는 거예요.

그래도 작전수행인데 먹을 것은 실어주지 않았습니까?

안 실어주죠. 그때는 발전기가 없어서 깜깜한 밤중에도 계속해서 군사 수송을 했죠. 칠흑 같은 어둠 속을 달리는 것은 굉장히 공포스러워요. 어디서 무엇이 튀어나올지 철로는 혹시 끈긴 것은 아닌지. 하지만 그런 무서움도 배고픔 앞에서 더뎌갔습니다. 저희한테 작전수행 명령 내려놓고 윗 양반들은 모두 가족을 데리고 피난을 갔습니다. 그런 걸 생각하면 무기력해지기만 했지요. 우리는 가족 생사도 알 길이 없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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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8시 30분 기관사인 나와 기관조사 권승국 보조조사 이태복이 책임지고 있는 군용열차는 영주역에서 대기 중이었다. 갑자기 폭발음이 들렸다. 포탄이 우리 열차위를 지나 영주역의 창고 지붕에 떨어졌다. 역사에 모여 있던 피난민과 군인들을 정신을 잃고 흩어지며 아수라장이 됐다. 잠시 후에는 조준을 실패한 아군의 포탄이 떨어졌다. 부상당한 이들은 병원열차가 오기만을 기다리지만 열차는 오지 않았다. 우리는 부상자들과 피난민과 아군을 싣고 역을 떠났다. 11시30분이 되자 적군의 포탄이 수 없이 날아들기 시작한다. 문수역까지 그들을 실어 나르는 동안 석탄도 물도 고갈 되었다. 방위선이 허물어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밤낮없이 버려진 사람들 버려진 열차들을 차례차례 후방으로 끌고 가는 일을 반복하고 있다.”

1950년 7월 28일

“안동 옹천역에 ‘군인 20명과 TNT 50상자를 싣고 출동하라’는 상부의 명령이 떨어졌다. 폭발할 수도 있는 상황이어서 거부했지만 지휘관은 권총의 총구를 나의 오른쪽 가슴에 겨눴다. 조심스레 기관차가 출발시켰다. 이 작전은 옹천~평은 간 내성천 철교를 폭파하는 작전으로 북한군이 철도를 타고 내려오는 것을 차단하기 위함이었다. 철교까지는 2.75㎞의 터널 구간을 통과해야만했다. 터널 속에서 기관차 화염의 온도는 상승하고 자칫 불꽃이 TNT에 옮겨지기라도 한다면. 어두운 터널 속의 시간이 마치 다시는 빠져나올 수 없을 만큼 길게 느껴졌다. 극도의 긴장감 속에서 천천히 터널을 나오자 열차에서 내린 아군들이 TNT를 설치했다. 도화선에 불을 붙이고 다시 아군을 태우고 화차를 움직이자 몇 분 후 굉음과 함께 철교는 폭파됐다. 통쾌함이 전해져온다.”

1950년 7월 30일

“19시 50분. 해는 서산에 걸려있고 적군의 기관총이 본 열차를 향해 쏘아 대고 있어 더 이상 머무를 수 없다. 안동역을 출발, 안동 서부초등학교도 폭격을 당했고 초토화 된 내 고향 안동 시내를 바라보니 너무나도 마음이 애련하다. 이제 낙동강을 건너면 언제 다시 돌아 올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눈물이 쏟아졌다. 화차의 창밖으로 생사를 알 수 없는 가족들의 얼굴이 스쳐 지났다.”

1950년 7월 31일

-수기 중에서-

그때 피난을 가실수도 있었을 텐데요

내가 기관차 책임자인데 교통부 장관의 책임도 져야하고 역장 책임도 져야하고 도선사무소 책임도 져야하고 기관차장 책임도 다 져야합니다. 수리공들도 전부 피난을 가고 없어요. 기관차가 고장이나면 어떻게 합니까. 나무토막을 가져가서 대처를 하더라도 군사수송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건 운전기술밖에 없는데. 우리의 본업이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이고 그렇습니다. 군인들의 협박도 있었지요. 총을 딱 가슴에 대고 ‘출발하지 않으면 죽는다’라구요(웃음).

종군기관사로 계실 때 가족들은 생계를 어떻게 하셨어요?

거의 다 죽은 줄 알았어요. 어느 날은 여자 분이 피난을 오다가 해산을 해야 해서 열차에서 아이를 받아줬어요. 그때 저도 갓난쟁이 딸이 하나 있었는데 생각이 많이 나더라고요. 집사람하고 아이하고는 얻어먹어 다니면서 좌천이라는 데까지 내려갔었습니다. 집안 어른들도 전부 밤중에 산 넘어 강 건너서 피난을 갔지요. 아버지와 동생들은 대구 밑에 청도에 내려가 있었고요. 1년 넘게 생사도 모르고 있다가 다시 만났지요. 가족들을 만났을 당시는 제가 부산 사상역까지 내려갔습니다. 사상역에서 미군 군수품을 싣고 증기가 잘 올라가지도 않는 기관차로 사흘 만에 안동까지 갔어요. 모든 역이 거의 폐허 상태였습니다.

그 당시에 종군기관사 분들이 몇 분이나 활동하셨습니까

많았어요. 그것도 안동, 제천, 경주, 동해가 각각 다 따로 있어요. 소속이 있었는데 그 사람들은 나중에 들어보니 보따리 싸서 다 도망갔습니다. 교통부장관부터 시작해서 전부 다 보따리 싸서 도망갔어요. 가족들 다 데리고. 전부다 피난 갔지요. 위에 있는 양반들부터 시작해서 615일 작전 해제가 될 때까지 버텨낸 건 우리 세 사람이 전부였어요. 저, 기관조사 두 명이서 이렇게 세 사람이 중부전선에서 남아서 전쟁을 치렀어요. 근데 우편을 갖다 줄 사람이 있나. 전화가 되나 아무것도 안됩니다. 전화 한 대라고 해봤자 삐삐선 달아가지고 200m 거리에서 왔다갔다 하는 거 뿐이었고, 그렇게 통신도 안 됐어요. 그런 상황속에서 615일 동안 군사수송했으니까 살아있는 것만도 참 용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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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인천상륙작전 이후에는 서울 탈환도 됐고 좀 쉴 여유가 생기지는 않았습니까?

“여전히 피난을 떠나는 사람들이 많았고 수송도 많았죠. 하루는 무릉역에서 열차사고가 났다는 소식이 도착했지요. 사고가 난 철로로 긴급수송을 위해 기관차를 몰고갔더니 사고 차량은 안전장치가 없는 화차에 민방위 대원을 잔뜩 싣고 터널을 빠져나오다가 사고가 났는데, 장내 신호기 담당자가 피란을 떠났기 때문이었습니다. 현장에 도착하니 사고로 여기 저기 흩어진 사람들 사이에서 비명소리만 가득했다. 사고 발생과 도착사이에 이미 많은 이들이 숨져있었다. 10월이 됐지만 폭격을 당해 엿가락처럼 휜 철로들은 그대로였어요. 쉴 틈 같은 것은 없었어요”

UN군의 참전으로 10월 말에는 우리 군이 압록강의 지역까지 올라갔었죠? 작전도 달라졌었습니까.

그 때는 수복해서 올라가는 판인데 인천상륙작전하고 난 후에 제가 평양까지 갔더랬습니다. 문산으로 해서 가버렸어요. 군수품 수송하고 병력 투입을 했었지요. 문제는 한밤 중에 올라가는데 그때는 불빛하나 없던 때였어요.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모르는 철길을 따라서 간다고 생각해 보세요. 언제 죽을지 모르는 운명이었지요. 밥 한 끼 먹여주지 않고 수송하라고 명령만 하는 정부가 참 무정하다고 생각도 했습니다.

“1951년 새해가 밝았다. 철도는 여전히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무너진 도로를 복구하러 떠나는 방위대를 실어 날랐고,
군인들 시신을 수습해 구덩이에 파묻었다. 차라리 죽어버릴까.
열차를 버리고 도망치려고 몇 번이나 마음먹기도 했다.
그러나 곧 1.4 후퇴로 다시 전쟁은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서울에서 행정부처의 짐을 적재한 열차와 피난민,
군수품 적재차량들이 줄을 잇고 있다.
또 다시 남으로 내려가야 하는 아픈 마음은
무엇으로 달래야 할지 말이 안 나올 지경이다.”

-수기 중에서-

전쟁이 곧 끝날 거라고 예상하셨을 거 같기도 한데요. 중공군이 내려와서 1.4 후퇴가 시작됐으니 다시 남으로 내려오셨겠군요.

1.4 후퇴를 떠나야 하는 절박감은 누구나 같은 마음이지요. 6. 25 전쟁 후 아직도 가족을 못 찾고 있는 와중에 떠돌이 신세가 되어 추위 속에 눈을 맞으니 막막한 인생살이가 발걸음을 멈춰집니다. 다시 그 길을 내려가야 하니까요. 고된 생활은 계속됐어요. 3월 31일 밤이었는데 ‘마의 터널’로 악명 높던 단양~죽령 간 터널을 지날 때였습니다. 열차 속도가 급격히 떨어지더니 아예 정지해버렸지요. 천정에서 떨어지는 물줄기가 레일에 흘러 기관차 바퀴가 헛돌았던 것 같은데 터널 속에서 우린 많은 양의 유독가스를 마셨고, 모두 정신을 잃었지요. 시간이 좀 흘러서 기관조사 이우용이 눈을 떴고, 가까스로 열차를 몰고 단양역까지 갔습니다. 우리는 미군 야전병원에 이송돼 응급 치료를 받았는데 자정에 기관조사 권인추가 숨을 거뒀어요. 제 후배이자 조수를 잃고 실의에 빠졌습니다.

이후에는 어떻게 하셨어요?

회복 후 다시 기관차를 몰았습니다. 1953년 7. 27휴전협정이 이루어지는 날까지도 철도에서 615일간 참전을 했다고 나중에 6. 25 종군기장을 수여 받았지요.

그럼 기관사로 일하신 총 기간은 얼마나 되십니까?

27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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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기관사를 하시게 됐는지 궁금합니다

처음에는 아버지께서 안동 농림학교에 시험을 보라고 해서, 시험을 보고 합격이 됐습니다. 어느 날 학교를 마치고 더운 날씨에 다리 밑에서 목욕을 하고 있었죠. 보니까 멀리 부산에서 신의주 가는 열차가 오는데 막 ‘칙칙폭폭’ 거리면서 올라오는 것을 보니 참 멋있더라고요. 그때 저는 다리 밑에서 옷을 벗고 목욕하다가 손을 흔들었단 말입니다. 그 기관사가 금테 두른 모자를 쓰고 파란 작업복 입고 하얀 장갑 끼고 기관사란 완장을 두르고 운전을 하더라고요. 그 모습이 얼마나 용감스러운지 ‘아, 내가 기관사를 한번 해봐야되겠다.’ 그런 생각이 들어더라고요. 당시에 아버지가 농림학교를 다니게 해주겠다고 여관에다가 하숙을 하게 저를 데려다놓고 아버지는 태백에 가서 사업(건축업)을 했습니다. 여관에서 밥 주고 잠도 재워주고 빨래까지 다 해줬는데 그걸 마다하고 철도에 취직을 했습니다.

몇 살에 기관사가 되셨습니까

열입곱 살에 시험을 봤어요. 제가 2년 만에 기관사가 됐거든요. 그때 안동기관차사무소에 직원이 한 500명 정도 됐었는데 기관차 승무원으로 가장 빨리 됐었죠. 최연소로 기관사가 된 거죠. 그때는 일본사람을 기관사로 쓰지 한국 사람에게 기관사 자리를 주지도 않았죠. 그 사람들 밑에 들어가서 고장 났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 지 전부 다 물었어요. 하루에 두어 번 씩이요. 법무조사로 있다가 일 년 뒤에 기관사 시험을 봐서 합격했어요. 그래서 농림학교를 그만 두었는데 아버지에게 혼났습니다. 하. 정말 쫓겨날 뻔 했어요. 실제 해보니까 정시에 딱 목표지점에 딱 맞게 도착했을 때 그것보다 기분 좋을 때가 없어요. 거기서부터 시작해서 다른 기술을 계속 배우면서 2년간 일하다보니 해방이 된 거예요. 해방 후에 기관차를 운전하는데 전부 썩었어요. 용광로에 곧 들어갈 고철 같은 기관차를 운전하는데 힘이 들어서 죽을 지경이었어요.

당시에 초반에 있던 기관차들은 일본에서 온 것들이겠군요

전부 일본에서 도입해서 썼지요. 낡은 걸로 조선 사람들만 부려먹으려고 했지. 그때 세계 2차 대전도 났으니까 일본 사람들은 일본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었던 거 같아요. 그때 일했던 사람들 참 많이 고생했어요. 손님들이 역에 나와서 개찰을 연결해서 서울로 가려고 준비를 하는데 증기가 안 올라가더라고요. 보일러가 노후가 되니까 안에 구멍이 생겨서 물은 새지 물은 또 계속 공급해야하지 그러다보니 증기는 안 올라가고. 그렇게 서울 가려면 며칠이나 걸리는지 손님들이 묻더라고요. 하하. 거기에 ‘우리도 잘 모르겠습니다’ 라고 만 답하지 달리 답이 없었습니다. 요즘은 상상이나 할 수 있겠어요?

굉장히 오래 고생을 하셨는데, 참전용사로 기관사로 수십 번을 표창을 받으셨습니다
생활에 어려움은 없으셨을 거 같기도 합니다

표창이랑 수상은 많이 받았어요. 그런데 국가에서 한 달에 보상금으로 18만원 받는 게 전부입니다. 저 같은 사람들이 참 많아요. 그 때 함께 고생했던 사람들이 전부 병원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어요. 일 년에 국회의원들도 수 천만원 씩 가져가고 퇴직하면 한 달에 120만원씩 주더라고요. 요즘 공무원들 연금이니 연봉이니 하는 이야기들 들으면 저는 솔직히 야박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6.25사변을 겪고 그래도 나라를 일으켜서 정상적으로 나갈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줬는데. 이런 모습이라면 후대에는 국가에 헌신할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힘든 생활이 오래 되셨으면 기관사를 그만 두셨을 법도 한데요

정년퇴임이 아니고 미리 퇴직했습니다. 1965년 영주에 수해가 났을 당시에 박정희 대통령이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 자격으로 군복을 입고 시커먼 안경 끼고 헬기를 타고 내려왔어요. 당시에 기관차 차고 안에서 망치를 들고 기관차 성능 점검을 하고 있었지요. 제 뒤로 와서 어깨를 두드리면서 ‘지금 뭐 하는 거냐’고 박정희 최고위원인 그래요. 지금 기관차 정비가 됐는지 점검을 해 봐야 안심하고 목적지까지 갈 수 있다고 했죠. 그래서 한 달에 월급을 얼마냐 받느냐고 묻더라고요. 그때 월급을 한 달에 3만 5천 원 정도 받았습니다. 그거밖에 못 받냐고 하시더라구요. 박정희 최고위원이 대통령이 되고 난 이후에 기관사 월급을 그때 받는 거에 배 이상을 받았어요. 그걸 받으니 힘도 나고 아이들 학교도 잘 보내고 가난에서 벗어났습니다.

퇴직은 언제 하셨습니까

그렇게 7~8년 기관사로 일하고 났는데 위에서 사고주임으로 가라고 하는 거예요. 사고주임은 철도 내에서 사고 나는 것을 전부 조사해서 담당관입니다. 거기가면 전에 받던 보수밖에 못 받습니다. 행정직으로 가니까요. 그러면 먹고살기도 곤란하게 되니까 사정사정해서 1년 연기를 했죠. 1년 연기 동안에 내가 퇴직금을 타가지고 장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1년 뒤에 사표를 냈고 퇴직금으로 120만원을 탔습니다. 120만원 타가지고 40톤짜리 화물차에다가 쌀 500가마를 실었어요. 의성에 가서 고구마도 한 뭉텅이 싣고 양파까지 열차 3량에 다가 싣고, 울릉도에 보내기 위해서 계약을 했어요. 묵호항으로 가는 화물열차에 실었는데 비가 밤새도록 와서 철로도 유실이 돼서 영주에서 떠나서 봉화로 못 가요. 그래서 퇴직금으로 산 물건들이 다 썩혀 버렸어요. 물이 빠지고 가보니 가마니 사이로 고구마 줄기가 나왔죠, 양파 싹이 났죠. 기가 차더라고요. 그래서 사람을 사가지고 거기 뿌리 자르고 줄기 자르는 작업을 다시해서 가마니에 담아놓고 왔는데, 이거 하나도 못쓰겠더라고요.

27년간 기관사로 일한 퇴직금을 한 순간에 잃었다니 막막하셨을 텐데요

친구를 잘 둬야 돼요. 저는 고향 친구를 참 잘 뒀어요. 그때 휘문출판사에 있는 친구가 제조창 관리과장을 했어요. 친구가 ‘학비하고 쌀은 책임질테니까 자네는 가서 일하고 돈 벌어라’그러더니 일자리를 줘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4개월 동안 책 외판을 하면서 300만원 벌었어요. 거기서 판매과장직을 주고 지프차 기사를 붙여서 주더라고요. 여기 제천 안동 경주 대구 역장들이 아는 분들이라 아침 조회시간에 팔아달라고 부탁을 한 거죠. 그때 휘문출판사에서 18가지 종류가 나오는데 그 책을 10개월 월부로 해서 팔았습니다. 그때 이런 사람을 첨 봤다고 출판사 사장이 350만원 정도 수당을 줬어요. 그 돈으로 영주 내려와서 집을 3채를 샀습니다. 그때, 사람이 살면서 좋은 친구를 사귀는 게 큰 자본이라는 걸 알았지요. 돈을 가지고 오니까 어머니께 혼났습니다. 처음에는 훔쳐왔다고 야단을 맞았는데 이런저런 사정으로 돈을 벌었다고 사정을 말하고 통장을 만들어서 어머니께 털어 놓았지요. 제가 10년 동안 그렇게 번 돈으로 새마을 운동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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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관사 퇴직 후 아들, 아내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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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노한 씨의 집 앞에서

김노한 씨는 슬하에 5남 2녀를 두고 있으며, 아내가 세상을 떠난 뒤 인적이 드문 작은 마을에 혼자서 지내고 있다. 자녀들이 서울로 거처를 옮길 것을 권유했으나 현재 영주에서 참전유공자회의 회장직을 맡고 있으며 회원들과 그 가족들의 복지 향상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는 집에 혼자 있는 것이 적적하다며 영주 역사(驛舍) 한 켠에 마련된 낡은 참전유공자 사무실에서 주로 생활하고 있었다.

인터뷰를 마치며…

김노한 씨는 철도 공무원을 마친 후로 새마을운동도 하고, 기관사로 있을 때 보다 훨씬 안락한 삶을 살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연대기에서 철도 기관사는 그의 인생을 이루는 가장 큰 축이며, 한 때 죽음의 문턱까지 몰고 갔다. 그러나 눈물이 마른 자국에는 행복의 문이 있다고 했던가. 기관사로 일했을 때 인맥으로 출판사 영업 사원으로써 수익을 올릴 수 있었으니 젊은 날의 고통이 훗날 행복을 가져다주기도 한 셈이다. 다만 그가 삶에서 안정을 찾게 된 계기가 철도를 떠나 출판사 직원이 된 이후라는 점은 꽤 씁쓸했다. 그의 모험담을 흥미진진하게만 들을 수 없었던 것은, 미안함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무언가를 빚지고 있는 사람들의 그런 미안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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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 류방원     사진 | 조윤구     사진제공 | 김노한     인터뷰협조 | 코레일 배은선 차장     퍼블리셔 | 박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