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de Out

Uncharted Land

지도에 없는 이름,

팔레스타인

이 오래된 지도는 이탈리아 지리학자 마리노 사누토(Marino Sanuto)가 1306년에 십자군 원정을 위해 그린
팔레스타인 지도를 참조해 1611년 지도 제작자 페트루스 베스콘테(petrus vesconte)가 인쇄물로 만든 지도다.
현재 지도의 작법과는 다른 초기 방식으로 제작되었으나 당시 팔레스타인 영토에 대한 지역들이 상세하게 설명되어있다.
400년이 지난 현재, 지도 작법은 발달했지만 지도에서 팔레스타인이라는 지명은 찾아볼 수 없다.
이 기사는 오랜 시간동안 한 국가가 지도에서 사라져가고 있는 과정에 대한 요약이다.

대인들이 팔레스타인이 자신의 영토라고 주장하는 논리는 성경 속의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브라함이 하느님으로부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약속받는데 그곳이 가나안, 현재의 팔레스타인 지역이다. 성경 속에서 유대인은 원래 가나안에서 살았다고 하는데, 가뭄과 전쟁포로로 이집트로 이동해 이집트에서 노예의 삶을 살던 유대인들은 모세의 인도로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오게 된다. 유대인들이 돌아왔을 때 가나안에는 정착해 살고 있는 아랍인(펠레스타인인)들이 있었다. 당시 유대인과 아랍인은 함께 평화롭게 공존했다. 이후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 뿐 아니라 유럽과 몇몇 국가로 퍼져나갔다.

유대인이 세계 각지로 퍼져 정착하는 동안 유대인에 대한 미움도 퍼지기 시작한다. 유대인에 대한 미움은 예수의 등장과 관계가 있다. 팔레스타인이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을 당시 유대인은 유일신인 여호와를 믿고 있는데 예수의 등장으로 그들의 신앙은 위협을 받게 된다. 예수는 당시 로마에게도 위협적인 존재였는데, 로마는 황제 숭배를 거부하는 예수를 투옥하게 된다. 유대교의 교리에 반하는 예수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유대교 제사장들은 로마에 예수의 십자가형을 주장했다. 예수가 세상을 떠나고 예수의 제자들과 신자들의 노력으로 기독교는 로마 제국에서 국교로 인정받고 유럽 전역에 확산됐다. 기독교가 유럽전역에서 득세하자 예수를 사지로 몰고 간 유대인들은 역풍을 맞게 된다. 세계 곳곳에서 유대인에 대한 핍박이 이어졌고 19세기까지도 이어졌다. 하지만 현대 역사가들은 종교적인 이유 이외에도 고리대금업으로 부를 축적한 유대인들의 자본에 대한 시기도 큰 원인이라고 설명한다.

세계 곳곳에 침투해서 살며 자신들만의 전통을 이어가던 유대인이 자신들 만의 나라를 건립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발단은 1894년 프랑스의 ‘드레튀스 사건’이다. 유대인 드레퓌스 대위는 증거도 없이 간첩죄를 뒤집어썼다가 프랑스 지식층의 구명으로 풀려나게 된다. 당시 오스트리아 일간지의 파리 특파원이었던 유대인 언론인 테어도르 헤르츨(Theodor Herzl)은 <유대 국가(1896)>라는 책을 출간하면서 시오니즘(Zionism)운동을 시작한다. 시온(Zion)은 예루살렘 근처의 작은 산(다윗의 성지로 알려져 있으며 유대인에게는 예루살렘을 대표하는 이름으로 통한다)으로 시오니즘은 ‘시온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다. 1897년 스위스 바젤에서 첫 시오니즘 운동이 개최된 후 대대적인 유대인 이주가 시작됐다.

하지만 시온주의를 비판하는 이들은 유대인이 성경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석해 이를 민족주의와 결합시킨 것이라고 주장하며 ‘시오니즘’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식민지화를 위한 억지 명분이라고 주장한다.

사라져가는 팔레스타인의 영토

3
%  :  
9
%  :  
88
%

19세기 말 영국의 개입 이전 유대인은 겨우 3% 기독교인은 9% 무슬림은 88%를 차지하고 있었다. 1905년 영국은 당시 영국으로 몰려드는 유태인들의 수용이 어려워지고 시오니즘을 주장하는 유대인들과 팔레스타인의 충돌이 예상되자 식민지였던 우간다에 유대인 국가건설을 제안한다. 유대인들은 영국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지도1

1917년의 팔레스타인

map1

지도 2 | 1946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영국은 적국인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던 팔레스타인을 이용하는 꾀를 낸다. 영국은 오스만투르크의 지배 하의 아랍인들에게 오스만투르크에 대항하면 아랍 국가의 독립을 약속하겠다는 ‘후세인-맥마흔 선언(1915)’을 했고, 영국을 도운 유대인에게는 유대 국가 건설을 돕겠다는 약속인 ‘벨푸어 선언(1917)’을 한다.

1920년 오스만 제국의 패배로 팔레스타인이 영국령이 되자, 팔레스타인 지방에는 벨푸어 선언의 실현을 믿고 이주하는 유대인들이 늘어났고 1933년 독일에서 나치 정권이 탄생한 후 박해를 피해 많은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지방으로 이주하면서 유대인과 현지에 거주하던 아랍인들 사이에는 불협화음이 붉어진다.

map2

지도 3 | 1947년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유대인 대학살로 600만 명에 이르는 유대인들이 목숨을 잃자 세계 여론은 시오니즘에 힘을 실어주게 된다. 영국은 유대인과 팔레스타인의 대립 문제를 더 이상 중재하기 힘들어지자 팔레스타인을 UN에 떠넘긴다. 1947년 유엔 특별위원회는 팔레스타인 지방을 아랍인 국가(팔레스타인)와 유대인 국가(이스라엘)로 분할하고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3대 종교의 성지인 예루살렘을 국제 관리 하에 두는 분할 안을 채택한다. 이로 인해 팔레스타인 내의 유대인 지역이 절반으로 확대되고 아랍 국가들은 거세게 반발하며 이스라엘과 중동국가간의 불화는 시작되었다.

map3

지도4 | 1949-1967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언하자 아랍 국가들은 이스라엘에 선전포고를 하며 제1차 중동전쟁이 발발했다. 이집트, 요르단, 이라크, 레바논, 시리아 등 초반에는 아랍의 협공이 유리하게 전개되었으나 전쟁이 지속되면서 아랍의 진영 내 불화와 미국의 이스라엘 원조로 전세는 역전되었다. 1948년 UN의 중재로 휴전되었으며 1949년 승리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영토의 80%를 확보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발생한 약 80만 명의 팔레스타인 피난민은 인접 아랍국들에 분산되었다.

map4

지도5 | 2012년

1967년 비무장지대인 골란고원 일대에 이스라엘이 농작물을 경작한다고 통보하자 격분한 시리아가 이집트, 요르단이 시리아와 협공하면서 6일간 이스라엘과 3차 중동전쟁을 벌인다. 하지만 국교수립으로 미국과 유럽의 원조를 받는 이스라엘이 압승하고 이스라엘은 가자지역, 구예루살렘지역, 요르단강 서안지역, 골란고원, 시나이 반도까지 점령했다.

이스라엘의 지배하에 들어간 영토는 이스라엘 독립 초기의 8배가 넘는다. 전쟁 중에 난민이 된 팔레스타인의 수는 점점 늘어났고 1964년 결성된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의 활동은 점점 활성화되기 시작한다.

map5

팔레스타인 자치구의 분리벽

팔레스타인을 얘기할 때
말하게 되는
세 지역

최근 팔레스타인 주거지인 서안 지구에서는 연이어 팔레스타인 청년들이 군인과 경찰에게 총격을 받아 사망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스라엘 당국은 군인에게 칼을 휘두르다 총격을 받았다고 전했고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이런 이스라엘의 주장을 그대로 믿을 수 없다고 반박했다. 당사자들에게는 어느 쪽이 진실인가가 중요하겠지만, 왜 팔레스타인 주민과 이스라엘 군인이 대면하게 된 것인지 애초부터 그곳에서는 무슨 일이 있어왔는지부터 알 필요가 있다. 이스라엘과 저항 단체이자 팔레스타인 집권당인 하마스가 충돌해온 또 다른 팔레스타인 주거지 지구의 상황은 어떨까. 가자지구는 지난 1년간 휴전 상태이지만 완전히 고립된 상태로 창살 없는 감옥으로 불리고 있다.

가자 (Gaza)

이스라엘 남서쪽, 이집트와의 국경지대에 위치한 가자지구는 원래 이집트의 통치를 받고 있었는데 3차 중동 전쟁 이후 이스라엘이 점령했다. 가자지구에 점령군으로 상주하던 이스라엘군은 2005년에 철수했지만, 여전히 가자지구는 이스라엘 당국에 의해 거의 완벽하게 봉쇄되어 있다. 선거로 선출된 하마스는 이스라엘과 충돌이 있을 때마다 이스라엘을 향한 로켓 공격을 감행하는데, 하마스가 무기를 만드는 데 쓰일 만한 물자를 가능한한 가자지구로 들여보내지 않는 이스라엘의 봉쇄정책 때문에 가자지구에 있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전기와 연료, 식량, 의약품 등 생필품이 만성적으로 부족하다.

서안 지구 (West Bank)

서안은 ‘요르단 강 서쪽에 있는 둑(West Bank)’이라는 의미다. 서안 지구는 국제법상으로는 팔레스타인의 영토이지만 1967년 3차 중동 전쟁 이후 이스라엘이 군사력으로 장악한 후 유대인 정착촌을 만들고 보조금 등으로 이주를 독려했다. 문제는 유대인 정착촌을 보호한다는 명목 하에 이스라엘군이 서안지구 곳곳에 상주하고 있어 사실상 이스라엘 군사 통제에 놓여있다. 이스라엘 정부는 꾸준히 유대인 정착촌을 확대하고 있으며 분리 장벽 설치를 강행해 팔레스타인 고립시키고 있다. 국제적인 시각에서는 제네바 협약과 국제법을 위반한 범법 행위라고 보고 있지만, 이스라엘 정부는 이스라엘 국민들은 자발적으로 이주를 선택했기 때문에 국제법 위반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예루살렘 (Jerusalem)

약 3000년 전 이스라엘 왕 다윗은 2000년 이상 거주해온 가나안인(人) 에브스 부족을 몰아내고 예루살렘을 수도로 정했다. 이스라엘의 후손들은 이곳에 성전을 짓고 살았지만 로마의 식민지가 된다. 로마 식민지 시절 예수가 태어나 기독교의 성지가 됐다. 이후 예루살렘은 7세기에 때 이슬람 칼리프 오마르 1세가 도시를 점령하면서 이슬람 도시가 됐다.

western-wall-1000

통곡의 벽(Western Wall)

유대인과 무슬림 모두에게 성지인 예루살렘은 유대교 성지인 통곡의 벽(Western Wall)과 이슬람교 성지인 알 악사 사원(al-Aqsa Mosque), 바위의 돔(Dome of the Rock)이 모여 있다.

현재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자치구인 서안지구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문제의 축소판으로 여겨진다. 1967년 이후 유대인들은 전쟁을 통해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유대인들의 수도로 선포했지만 여전히 국제법상으로는 어느 나라의 소유도 아닌 도시다.

1400
  :  
8

Victims

2008년 12월 27일부터 2009년 1월 18일까지 22일간 1,400명의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희생당했다. 이 기간 동안 이스라엘 전투기는 2,500여 차례 출격했고, 전차 포병 함대 등으로 가자 전지역이 초토화됐다. 이에 대항하는 하마스와 팔레스타인 무장단체들은 778발의 수제로켓과 박격포로 응수했다. 1,400명의 팔레스타인 주민이 살해당하는 동안 이스라엘인 8명이 희생됐다.

미국의 코믹저널리스트 조 사코(Joe Sacco)는 팔레스타인을 취재하며 보고 들은 것들을 만화로 그려왔다. 그의 만화를 보면 그래픽 노블로 착각할 수도 있으나 픽션을 보여주는 그래픽 노블과는 좀 차이가 있다. 오히려 그래픽 저널로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2001년 펴낸 <팔레스타인>은 9편의 만화 시리즈를 묶어 출간한 것으로 1987년 벌어진 ‘인티파다(이스라엘군 점령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를 그려 1996년 미국 도서출판 대상을 받았다. 2012년 국내에 출간된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비망록>은 1956년 가자 주민 학살과 2002년 이후 발생한 사건들을 넘나들며 설명하고 있다. 직접 목격한 것과 학살에서 살아남은 이들의 증언을 토대로 쓰여진 이 책은 가자 지구의 어제와 오늘의 진실에 한 발짝 다가서게 한다.

표지-edit2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비망록>
(도서출판 글논그림밭)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비망록>은 그래픽노블로는 최초로 ‘진실을 말하는 기자들’에게 주는 리덴아워 상(Ridenhour Prizes)을 수상했다.

부록-1000

1956년 사건 기록들과 유엔의 문건들, 대담의 내용들을 부록으로 담고 있어 당시 팔레스타인에서 자행된 사건의 진실들을 엿볼 수 있다.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 비망록>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Epilogue

독일과 유대인, 2차 세계대전의 전범과 피해자. 두 국가의 각기 엇갈린 행보에 국제 사회 여론은 다시 쓰이고 있다. 독일의 메르켈 총리는 최근 시리아 내전 난민을 적극 수용하겠다는 입장을 밝혀 그간 ‘전범국가’의 이미지를 벗고 상생의 이미지를 얻게 됐다. 반면 이스라엘은 과거에 고통 받은 만큼 팔레스타인인들에게 대물림해주고 있다는 인상만을 주고 있다는 여론이다.

IPCRI, 아래로부터의 작은 움직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연구·정보센터
IPCRI : Israel Palestine Creative Regional Initiatives

평화를 교육할 수 있을까. 평화를 느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평화를 교육할 필요도 있다.

1989년 팔레스타인 정치지도자들과 이스라엘 좌파 지도자들의 협력으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연구·정보센터(IPCRI)이 설립됐다. IPCRI 사무처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인원 반반씩 이뤄져 있으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유일한 대화통로로 이용되고 있다. 연간 5천여명의 학생이 참여하는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모두에게 서로를 이해시키고 평화를 교육하고 있다.

social media10

할리우드의 영화 속에 단골로 등장하는 테러리스트들이 주로 시리아나 팔레스타인인 배경에는 미국의 ‘이스라엘 껴안기’가 있다. 미국은 이스라엘을 통해 중동의 단합을 막을 수 있었고 중동에서 자신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명분을 만들었다. 미국·영국·프랑스 같은 강대국들이 시리아나 팔레스타인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을 주어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벌인 제국주의 전쟁으로 인해 아직까지 아랍권이 분열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해 EBS 다큐멘터리 영화제 <EDIF>는 영화감독과 평론가들의 보이콧으로 <이스라엘 특별전>을 취소했다. 이스라엘도 분명 비극을 설명할 기회는 필요하겠지만, 영화조차 찍을 수 없는 팔레스타인의 상황이라면 어딘가 불공평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관객들이 이스라엘의 시각만으로 팔레스타인 사태를 바라보게 된다면 우리는 앞으로도 여전히 <아이언맨> 같은 태도로 중동을 바라봐야할지 모른다.

팔레스타인이나 중동의 무장단체들이 자국민들에게도 위험하게 느껴질까. 우리의 과거를 떠올려보자. 한국의 독립운동가가 일본에서 테러리스트로 비춰지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만약 1945년 8월 15일 일본으로 독립을 하지 못했다면, 1953년 7월 27일 한국전쟁이 휴전협정을 맺지 않았다면 지금 한국의 지도 역시 크게 달라져 있었을 것이다.

vmag-bylogo-black
에디터 | 류방원     포토그래퍼 | 조윤구     지도제작 | 이지혜     지도편집 | 김용선     퍼블리셔 | 갈미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