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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해, 시야에 출입구가 들어오는 공간에 자리를 잡았다.

웨스턴 펍(PUB)답게 올드팝이 흐른다. 비틀즈가 부른 ‘Yesterday’. 푹신한 의자에 반쯤 누워 익숙한 음을 읊조리고 있다가, 입구에 달려있는 종소리를 듣고서 고개를 들었다. 체격이 건실한 두 남자가 쭈뼛쭈뼛 들어오더니 주변을 살핀다. 한 손을 들고 흔들고 있는 기자를 발견하곤 가벼운 목례를 한다. 서로 마주하고 얼굴들을 찬찬히 살펴보니 이렇게 써있는 듯 하다. ‘지금 긴장 중’. 풀어줘야 할 듯해서 가볍게 술 한잔부터 마시고 이야기를 시작하기로 했다.

시원하게 맥주를 들이킨 시훈은 금새 풀린다.

“워낙 활동적이고 사람들을 만나는 걸 좋아해서 술자리를 자주 즐겨요.”

 

눈 꼬리는 내려가고 입 꼬리가 올라가는 얼굴을 찬찬히 뜯어 보니 ‘착하게 생긴’ 소지섭이 떠오른다. 주종과 주량을 물었다. “종류는 가리지 않는 편인데, 강하지는 않아요. 소주 1병이면 적당히 기분 좋게 취하죠. 대신 미식가라 어떤 음식과 마시느냐를 더욱 중요하게 생각해요. 요즘 돌멍게랑 꽃게가 제철이라 자주 먹어요. 소주 안주로는 으뜸이죠.” 엄지를 ‘척’ 들어올린다. 고개를 왼쪽으로 돌려 성훈을 바라봤다. 한참을 서로가 멀뚱멀뚱 쳐다봤다. 지금 자리가 소개팅이 아니고 인터뷰를 위해 만든 시간이란 점을 되짚어주자, 그제서야 입을 연다. “아… 원래 친해지면 말을 잘 하는데…” 좀처럼 쉽게 열릴 입이 아닌 듯해서 비겁한 변명일 뿐이라고 타박하며 술 한잔을 청했다. “낯을 심하게 가리는 성격이에요. 함께 일하는 동료들과 제작진과의 회식을 제외하면 정말 친한 친구들과 술을 즐기거나 집에서 혼자 마셔요. 하하” 입안에 맥주를 조금 털어 넣으며 살짝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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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튼콜을 꿈꾸며

고독을 씹었던 그 시절’

무대를 꿈꿨던 시절로 돌아가보자 했다.

시훈이 먼저 입을 뗀다.

“출발이 늦었어요. 25살에 연기를 해보기로 결심했거든요.” 입시 때 영문학과를 지원해서 캠퍼스 생활을 누렸던 시훈은 영미희극을 다루는 교양수업을 듣게 됐다. 당시 미국 희극을 주제로 무대를 꾸미는 과제를 계기로 연기자를 꿈꾸기 시작했단다. “배우, 연출가, 작가 등 구성원들마다 각 역할이 달랐어요. 저는 지휘봉을 들고 팀원들을 움직이는 연출을 맡았는데, 재미를 느꼈어요. 또 재능이 있다고 생각했죠.” 목표가 생긴 시훈은 군대를 다녀온 후, 부모님께 인생을 새롭게 쓰고 싶다는 뜻을 밝혔단다. “지금은 응원해주지만 처음에는 어머니께서 반대를 심하게 했죠. 제가 내세울 게 없다고 생각했어요. 아버지도 늦은 시작을 안타까워하셨지만 묵묵히 제 꿈을 지지해주셨죠. 두 분께 정말 죄송했어요.” 당시를 회상하며 고개를 떨군다.

결국 26살에 연극영화과에 진학을 했고 어린 동기들보다 더욱 열심히 학업에 임해 일년 만에 연극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로 데뷔를 하게 됐단다. 꿈을 이뤘다는 희열과 실감은 ‘무대’가 아닌 ‘돈’이었다는 사실이 재미있다. “바라만보던 무대에 섰지만 별 감흥은 없었어요. 그런데 첫 개런티가 들어온 날 환호를 외쳤죠. 지금도 생생히 기억나요.” 시선을 먼 곳에 두고 빙그레 웃는다. “집 앞 편의점 ATM기기에서 출연료 전부를 현찰로 뽑았어요. 50만이 들어있는 봉투 두 개를 양 쪽 주머니에 넣고 집으로 향했죠. 늘 비어있던 주머니가 가득해져서 불안했던지, 계속 뒤를 돌아보게 되더라고요. 도착하자마자 엄마 아빠께 봉투 하나씩을 건넸는데 정말 좋아하셨어요. 그때부터인 거 같아요. 응원해 주기 시작했던 시점이…”

성훈은 출발은 빨랐다.

무대를 꿈꿨던 시절로 돌아가보자 했다.

시훈이 먼저 입을 뗀다.

어릴 적부터 배우를 해보고 싶었던 성훈은 일찍부터 방향을 잡고 20살에 연극영화과에 진학했다. “학기마다 정기적으로 연극 공연을 했는데 정말 즐기며 했어요. 이런 말이 있어요. ‘커튼콜이란건 마약과 같아서…’ 한 번 무대에 서보면 그 맛을 잊을 수 없다는 뜻을 담고 있죠. 무대에 서 본 자들은 당시 그 느낌을 결코 잊을 수가 없어요.” 평소 친분이 두터웠던 교수님 영향도 많이 받았단다. 졸업을 한 후 추천을 받아 대학로에 있는 한 극단에 들어가게 되면서 실제적인 연극인으로 거듭났다. 안정적으로 둥지를 틀 수 있는 기획사가 생겼고, 인지도가 높은 연극 ‘옥탑방 고양이’ 무대를 통해 나름 화려한 데뷔를 했다. 다작은 아니지만 틈틈이 영화에도 출연하며 역량을 쌓았다.

탄탄대로면 좋겠다지만, 누구나 한 번은 엎어지는 법이다. 대학로에 입성한 성훈은 시련을 겪게 된다. “어느 순간 작품이 들어오지 않았어요. 외롭고 괴로웠던 시간이었어요.” 기획사는 있지만 돈벌이가 없었던 성훈은 파트타임 잡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술집, 카페, 백화점, 공사판 등 안 해본 아르바이트가 없어요. 밥은 먹고 살아야 하니까 무작정 했었는데, 어느 순간 지금 뭐하고 있는 건가라는 의문이 들었죠.”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 후 기획사 대표를 찾아갔단다. “사장님께 연기를 해보고 싶다고 풀어달라고 했어요. 고맙게도 계약서를 돌려주시더라고요.” 두 손을 모은 성훈은 진지한 톤을 이어간다. “당장 무대에 서겠다는 기대를 버리고 공연장 주변을 맴돌았어요. 잡일도 돕고 연극이나 뮤지컬 OST도 팔았죠.” 노력하는 자에겐 기회가 오는 법이 랄까. 고군분투했던 성훈은 서울예대 동기들이 함께 만든 작품을 꾸민 무대에 설 수 있게 됐다. “행복해서 눈물이 나더라고요. 잊고 있었던, 아니. 잊어야만 했던 쾌감과 재미를 절실히 느낄 수 있었죠. 한편으로는 허무하기도 했어요. 아르바이트를 했던 몇 년 동안 무엇을 하며 살아왔는지에 대한 의구심이죠. 그래서 더 열심히 연기를 하게 된 거 같아요.” 지난 고독했던 세월을 돌아본 성훈은 천장을 바라보며 깊은 숨을 토해낸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어제를 돌이켜봤으니, 내일을 그려보자고 했다.

초반보다 긴장이 풀렸던 건지, 과거를 회상하며 감성이 부풀어 오른 건지. 이번에는 성훈이 먼저 이야기를 시작했다. “올 초에는 공연을 많이 접해보자는 게 목표였는데, 감사하게도 어느 정도 이뤘다고 생각해요. 내년에는 공연뿐만 아니라 방송이나 영화에 조금 더 집중해 보고 싶어요.” 다양한 매개체를 접해 보다 다양한 경험과 넓은 시각을 갖고 싶단다. 더불어 급하지 않게, 묵묵히 연기자의 길을 걷고자 한다고. “이런 말이 있잖아요.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리 울었나 보다’라는… 꽃 한 송이가 피어나는데도 세 계절이라는 긴 기다림이 필요해요. 아름답고 빛나는 승리를 바라면서 기다리고 인내하지 않은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해요.”

옆에서 조용히 귀만 열어뒀던 시훈이 말을 돕는다.

“맞아요. 모든 성공에는 고통이 따르기 마련이죠. 배우 유오성 선배가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나와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대중에게 알려진 연기자들이 방송에 나와서 엄살 부리는데 잘못된 생각이라고요. 자신들이 연극했던 시절, 라면만 먹었네 힘들었네 라며 투정을 부리면 안 된다는 거죠. 똑 같은 생각이에요. 누가 떠밀어서 하는 게 아니잖아요. 선택도 책임도 제 몫이라고 여기고 더 배우겠다는 의지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연기파보단 인간적인 배우로 기억되고 싶다는 시훈. “연기적으로 대단한 사람이 되는 건 아직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두루두루 많이 친해질 수 있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적을 두고 살지 말자라는 게 좌우명이기도 하고요.” 방긋 웃으며 담대하게 말하는 시훈을 잠자코 보고 있자니, 훗날 배우를 넘어선 연출가가 되어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살짝 스친다.

남자 둘 여자 하나 동갑내기 세 사람이 모여 술판을 벌였다. 맥주잔을 들고 건배를 외치는 건 물론이고 포켓볼, 다트 게임을 즐기며 제법 빨리 친해졌다. 기사에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자리에 앉아 이런 저런 이야기들도 많이 나눴다. 하나만 뽑자면 첫사랑. 성훈에겐 신세계였다. 마냥 예뻤던 그녀와 함께 하는 하나하나가 인생에서 처음 해보는 경험들이었단다. 알리오 올리오도, 에그 베네딕트도 처음 맛 보며 매일 새로워진 자신을 발견했다고. 시훈에겐 상처다. 처음으로 마음을 열었던 그 아이가 자신만이 아닌 다른 두 남자와 동시다발적인 ‘연애 놀음’을 했단다. 발각을 했지만 발뺌을 해서 결국 이별을 고했다는 가슴 절절한 스토리다. 비슷한 시간을 살아온 사람들이 모여서인지, 대화도 잘 통했고 재미도 있었던 유쾌한 인터뷰였다.

기획 및 취재 l 김경미 기자
퍼블리싱 l 박정은 . 디자인 l 이현정
비주얼다이브 연예팀 ㅣenter@visualdive.co.kr